마틴 루터 킹은 미국의 비폭력 흑인 인권 운동가이며 개신교 침례회목사로 킹목사라고 불리웁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인 마틴 루터킹 시니어는 목사였고 가족들도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마틴 루터 킹 역시 개신교를 믿었습니다. 이후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며 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엔 목사가 되기로 하고 모어하우스 칼리지와 크로저 신학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교파는 침례회입니다.  대학에서 인권운동을 함께 한 코레타 스콧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대학을 다니면서 차별을 받았고 이로인해 목사가 된 이후에 흑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앨라배마 버스 안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여성 흑인이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포되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하여 5만명이 넘는 알라바마의 흑인들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게 되었고 차가 있는 흑인들은 카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년동안 운동이 지속되자 로자 파스크는 풀려나게되고 흑인들이 버스에서 백인들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체포된다는것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얻어내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인권운동을 전개하여 흑인과 백인의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일부 과격파 흑인들을 달래고 달래서 비폭력 운동을 펼쳐왔으며 1965년 이후에는 과격 운동가인 말콤을 만나 과격파 운동가들과의 연대를 꾀하지만 1968년 4월 과격파 백인단체의 인물인 제임스 얼 레이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음모론이 발생하게 됩니다. 미국 전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에 의해서 폭동이 일어나고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차량 파괴 약탈등 폭력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 폭동은 흑인 지도자의 요청과 수천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되어 해산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흑인들의 목사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로 시작한 연설은 지금까지도 인류에 회자되는 역사적인 명연설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명대사는 지금까지도 교과서에 실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날 따로 준비한 원고가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마음이 바뀌게 되었고 평소에 그가 즐겨하던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