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능으로 인해 나라가 일본군에게 짓밝히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항리를 수호하기 위함이였습니다.
의병은 양반에서 천민까지 있었으며 의병 활동을 하는동안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의병장은 거의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많았고 무인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꾀 많았습니다.
의병을 일으키는데 적합지로는 자신이 살아온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에 선정을 베풀어 지방민들이 잘 따를수 있는곳을 택하였으며 나아가 더 넓은 지역에서 의병을 불러 모았고 활동무대도 더욱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민족적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촉발 시킨것은 의병장이였습니다 또한 오랜기간 유학교육을 통하여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것도 무시못할 요인으로 보입니다.
1953년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의병 숫자는 관군의 4분의 1정도인 2만 3천여명으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임진년 1592년에 비해서 많이 줄어든 수치입니다.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관군이 차차 회복되고 의병을 절제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일이 많아서입니다.
의병장으로 유명한분들에는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천일등이 있습니다. 공을 세우고 벼슬에 들어간사람도 있고 적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들도 있습니다.
이중 곽재우는 현풍유생으로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붉은옷을 입는다 하여 홍의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의병들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들과 싸워 적의 호남 진출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인홍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일본군들을 물리치고 삼천명의 의병을 모아 성주 합천 함안등을 방어하였습니다.